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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하철로 간 여행지

남한산성 성곽길 걷기(북문에서 남문까지)

 

2024년8월28일 남한산성  성곽길(북문에서 남문까지)

 

안녕 하세요? 이웃님들~^^

 

8월들어서 오랜만에 날씨좋은날 

파란 하늘에 걷기좋은날 2년만에 다시 남한산성을 찾았습니다.

입추가 지나 아침 저녁으론 선선한 바람이 불고 

한낮의 열기도 예전같지가 않을것 같아서 

2년전 남한산성 성곽길을 다시 한번 걸어 보았습니다.

코스: 남한산성 행궁---->북뭄---->남문까지

 

남한 산성 성곽길 시작점

 

8월28일 아침 일어나 밖을 내어다 보니 

예전 같지 않은 선선한 바람이 나를 맞이 한다.

장장 2개월동안 그 뜨겁던 열기도 폭염도 조금은 수그러진 듯 

가을날 부는 바람처럼 내 빰을 스치고 지나간다.

무심히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보니 

가을이 온것 처럼 파란 하늘에 드문드문 뭉게구름들이 

반갑게 내 머리위로 지나간다.

 

이렇게 좋은날 

무작정 카메라 가방을 어깨에 매고 

울집앞  용마산역 7호선 지하철을 탄다.

그런뒤 군자역에서 8호선 모란역행 타고 남한산성 입구역으로 달린다.

그리고 다시 남한산성 입구역에서 시내버스 9번(경기도 성남버스)를 타고 

남한산성 행궁부 도착하여 북문에서 남문까지 성곽을 따라 걷기로 한다.

 

 

남한산성 행궁  한남루 

 

행궁은 다음 기회때 둘러 보기로 하고 

오늘은 그냥 지나쳐 갑니다

 

남한산성 천흥사 종각

 

천흥사 종각 동종

 

 

침괘정으로 오르는 돌계단

 

정확한 한자음은 ‘침과정’인데, 관례상 ‘침괘정’으로 부른다. 

침과는 ‘창을 베개로 삼는다’는 뜻으로, 병자호란의 치욕을 되새긴다는 의미이다.

역사적 변천

정확한 창건 시기는 알 수 없다. 다만『남한지(南漢志)』에 의하면, 

1624년(인조 2)에 남한산성을 쌓을 때 수어사(守禦使) 이서(李曙, 1580~1637)가 

울창한 숲에서 그 흔적을 발견하였다고 하며, 

주변은 백제 온조왕의 왕궁터라고 전한다. 

하지만 주변에는 군기고(軍器庫)가 있었다고도 하므로, 

이서가 발견한 흔적은 군기고였을 가능성이 크다. 

그 뒤1751년(영조 27)에 광주유수(廣州留守) 이기진(李箕鎭, 1687~1755)이 짓고는 침괘정이라고 불렀다.

 

내용


앞면 7칸, 옆면 3칸에 겹처마 팔작지붕을 올린 모습인데, 

누정 건물로는 규모가 큰 편이다. 

기둥 배열만으로 보면, 가운데에 도리통 5칸, 양통 1칸의 내진부(內陣部)를 두고, 

그것의 네 주변에는 툇간[退間]을 둔 내외진형(內外陣形)구조이다. 

하지만 실제 공간의 구성은 한쪽에 도리통 2칸, 양통 3칸의 넓은 대청을 두고서, 

이것에 3면으로 툇간을 돌린 도리통 4칸, 양통 1칸 규모의 온돌방을 붙여, 

기둥 배열과 공간 구성이 일치하지 않는 독특한 평면을 이루고 있다.

이익공식(二翼工式)으로 2고주(高柱)7량(樑)의 가구(架構)인데, 보는 모두 직선으로 다듬었다.

 동자기둥을 사용하였고, 대공은 판대공(板臺工)으로 끝부분에 화초를 조각한 파련대공(波蓮臺工)이다. 

네모기둥은 비교적 굵은 편으로 흘림은 거의 느낄 수 없는데, 

모서리를 접고서 4면에 2줄의 둥근 선인 쌍사(雙絲)를 내었다. 

대부분 우물천장으로 꾸몄지만 대청과 툇마루는 연등천장이다. 

온돌방에는 우물마루를 설치하였고, 합각에는 풍판(風板)을 두었다.

 받침은 긴 돌을 1단으로 쌓은 외벌대이며, 주춧돌은 자연석을 네모지게 약간만 가공하였다.

(다음백과 참조)

 

이제, 본격적으로 북문으로 간다.

 

 

북문으로 가는길 카페와 식당들이 줄비하다.

 

청기와정

 

이쁜카페 아말피

 

 

 

저만치 복원한 북문(전승문)이 보인다.

 

북문(전승문)

 

싸움에 패하지 않고 모두 승리한다는 뜻에서 '전승문'이라고도 부르는 북문은 

병자 호란 당시 기습 공격을 감행할 때 사용하던 문이다. 

하지만 북문도 쓰라린 패전의 경험이 있다. 

당시 영의정 김류의 주장에 의해 군사 300여 명이 북문을 열고 나가 

청나라 군과 맞붙었으나 적의 계략에 넘어가 전멸하고 말았다. 

'법화골 전투'라 불리는 이 전투는 병자 호란 당시 남한산성에서 있었던

 최대 규모의 전투이자 최대의 참패로 기록된다. 

이후 문의 이름을 패전의 경험을 잊지 말자는 뜻에서 전승문(戰勝門)이라 칭하였다. 

선조 때의 기록을 보면 북문은 인조 2년(1624)에 신축된 성문으로 추측된다.

 

2021년부터 시작한 남한산성 북문 해체·보수공사 완료로 11월 1일부터 남한산성 북문을 개방

 

북문을 둘러 보고 서문으로 간다

 

 

햇살이 너무 눈부셔 사진이 담기가 예매하다.

 

 

북문 옆 성곽길에서 담은 풍경

 

 

 

 

 

연주봉 옹성으로 오르는 계단길

 

 

가파른 나무계당길 

조금은 힘들고 숨이차 오른다.

 

암문

 

 

연주봉 옹성

 

연주봉 옹성 암문은 제5암문으로 암문은 비밀통로랍니다. 

폭이 95cm, 높이가 180cm로 연주봉 옹성으로 이어졌습니다. 

연주봉은 465m이라고 한다.

연주봉 옹성은 한강과 서울, 하남과 남양주 일대가 쫙 펼쳐져 보이는 요충지라고 한다. 

연주봉 옹성에 서서 앞을 바라보니 전망이 정말 좋다.

 

연주봉 옹성은 한강과 서울, 하남과 남양주 일대 풍경

 

 

다시 성벽을 따라 걷는다

 

 

성벽을 따라 걷다가 서문에 가까워 질무렵 서울 잠실 롯데 타워 방향 풍경을 담는다

 

 

카메라 줌으로 당겨서 잠실 롯데타워랑 주변을 담는다.

 

 

곧 서문이다.

 

 

서문(우익문)

 

산성 동쪽 모서리 부분의 450m 지점에 있다. 

동문이 좌익 문이므로 서문은 우익 문이라고 부른다. 

경사가 급하여 물자를 이송하기는 어려웠지만, 

광나루나 송파나루 방면에서 산성으로 진입하는 가장 빠른 길이었다. 

병자호란 때 성문을 넘으려는 청군과 전투가 있었던 곳이다. 

그리고 인조가 소현세자와 함께 서문을 통해 청나라 진영으로 가서 화의를 맺고 항복을 하기도 했다.

서문 인근에 전망대가 있는데, 위례신도시와 롯데월드타워, 한강, 

그리고 남산 서울타워를 모두 조망할 수 있다. 

특히 롯데월드타워와 한강, N서울타워와 남한산성 서문이 일렬로 정렬되어 있어

 옥수동 달맞이 공원, 응봉산 팔각정과 함께 서울의 야경 포인트로 유명하다.

 

서문 전망대

 

 

롯데월드타워와 한강, N서울타워 풍경

 

카메라 줌으로 당겨서 담은 롯데타워와 한강

 

 

 

다시 성곽 성벽을 따라 남문으로 재촉한다.

 

 

 

 

수어장대 들어가기전 지나온 성벽길 

멀리서 바라보는 남한산성 성벽이 너무 아름답다.

 

 

청량당

 

남한산성은 통일신라시대에 축성된 이후 도성(都城) 인근에 위치한 요새(要塞)이며, 

청량당에 모셔진 이회(李晦)장군은 ‘매당왕신[鷹堂王神]’으로 남한산성을 대표하는 수호신이다. 

청량당(淸凉堂)은 수어장대 좌측에 있으며, 이회장군을 모셔놓은 신당(神堂)이다.

이회장군은 조선 인조 2년(1624) 남한산성 축성 때에 동남쪽의 축성공사를 맡았으나, 

축성 경비를 탕진하고 공사에 힘쓰지 않아 기일 내에 마치지 못하였다는 모략을 받고 사형을 당했는데, 

그의 처첩도 남편의 성 쌓는 일을 돕기 위해 삼남지방에서 축성자금을 마련하여 

돌아오는 길에 남편이 처형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한강에 투신 자살하였다. 

그 후 그가 이룬 공사를 재조사 해보니 견고하고 충실하게 축조되어 있어 

그의 죄가 없음이 밝혀져 서장대 옆에 사당을 지어 그의 넋을 달래게 되었다.

연원 및 변천


예로부터 청량당은 서울에 있는 ‘국사당’과 같은 곳으로 

이곳 주민들과 무속인들이 대대로 ‘대감땅’으로 섬겨왔다. 

과거에는 청량당 옆에 오두막집이 하나 있어 당지기 무당이 거주하며 매년 행하는 당굿을 주관하고,

 무속인들에게 일정한 이용료를 받고 당에서 굿을 할 수 있도록 편의를 제공하였다.

한국전쟁 당시에는 청량당 50여 미터 앞에 당주집이 있었는데, 

주위에는 향나무와 전나무가 있었으며, 초가집으로 안방과 건너방 두 칸 그리고 안방 앞에 부엌이 있었다고 한다. 

그곳에서 배씨무당은 당을 관리하며 굿을 주관했으며, 

산성리의 주민 일부가 이 곳에서 일을 도와주며 함께 거주하기도 하였다.

한국전쟁 무렵에 청량당에서 배씨무당을 도우며 일을 하였던 이충녀에 따르면, 

배씨무당이 있을 때 칠석과 초파일에 청량당에서 치성을 올리고 10월 상달에 굿을 했으며, 

굿을 할 때 배씨는 갓을 쓰고 청룡포를 입고 대감만 놀고 나머지는 다른 무당들이 했다고 한다. 

또한 당시 굿을 할 때 성남 사기막골의 곰보만신과 송파에서도 만신들이 왔다고 한 점으로 보아,

 청량당에서 산이굿과 강신무의 굿이 함께 행해진 것으로 보인다.

한국전쟁 이후에는 산성리에 거주하는 김보살이 청량당을 관리했는데 

그는 굿을 잘하고 제자가 많았으며 남편은 굿판에서 장구 · 호적 · 피리 등을 반주했다고 주민들은 전한다. 

10월에 김보살이 날을 받아 청량당에서 굿을 하면 일부 주민들은 돈이나 쌀 한 말씩을 거두어 굿에 참석했다고 한다. 

이 굿은 김보살이 옛날부터 청량당에서 행해진 도당굿의 전통을 이어받아 자신의 ‘진적굿’을 겸한 것으로 보인다.

김보살이 작고한 이후에는 남한산성 관리사무소에서 무당들의 청량당 출입을 막아 

그 곳에서 굿하는 것은 한동안 볼 수 없었지만,

 1990년대 중반부터 남한산성 도당굿보존회가 주관하여 산성리 주차장에서 청량당을 보며 도당굿을 하고 있다.

 

수어장대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1호였다가, 2021년 12월 27일에 보물로 승격 지정받았다. 

남한산성에 구축된 5장대 중 하나이다. 

5장대 중 동장대를 제외한 4장대는 17세기 말엽까지는 단층 누각 건물의 형태로 남아 있었지만, 

18세기 중엽에는 5장대 모두 파괴되어 터만 남아 있었다. 

그 후 18세기 중후반에는 서장대와 남장 대를 2층 누각 형태로 건립하여 

19세기 후반까지 남아 있었지만, 현재는 서장대인 수어장대만이 남아 있다.

수어장대는 남한산성의 서쪽 주봉인 청량산 정상에 세워져 있으며 

지휘 관측을 위한 군사적 목적에서 세워진 누각이다. 

성내에 현존하는 건물 중 가장 화려하고 웅장하다. 왼쪽에는 청량당이 있으며, 

뒤편에는 우물이 있어 장대에서 근무하는 장졸에게 물을 공급했다고 한다.

 

 

 

매바위 

 

수어장대 남동쪽 모서리에 있는 일명 매바위라 불리는 바위에 새겨진 암각문으로

 사각형으로 제액을 파고, 그 안에 '수어서대(守禦西臺)'라고 새겼다. 

바로 이곳이 수어사(守禦使)가 서장대를 지휘하던 곳이었음을 알려주는 명문이다.

 

다시 남한산성 성곽길 끝을 향해 남문으로~~^^

 

내리막 계단길

 

 

 

 

 

수어장대에서 한참을 가파른 성곽길 오르고 내리는 길을 걷다 보니 

남문이 저앞서 나를 맞이한다 휴유!~ 이제 끝인가 보다.

 

남문위에서 바라본 풍경

 

남문(자화문)

 

성의 서남쪽 곡저부의 해발 370m 지점에 있다.

 왕이 다니는 문에 걸맞게 4 대문중에서 가장 크고 웅장하다. 

인조도 병자호란으로 남한산성으로 들어올 때 이 문을 통해서 들어왔다. 

지금의 문루는 1976년 초석 일부만 남아 있던 것을 새로 보충하여 복원하고 현판을 단 것이다. 

문루는 정면 3칸, 측면 3칸으로 동문과 비해 비교적 그 규모가 크다. 

장초석을 사용하여 기둥 높이는 낮지만, 건물의 전체 높이는 약간 더 높다.

 

 

이제 남한산성 관리 사무소가 있는 공원 입구 내려 간다

 

여기까지.

남한산성둘레길은 시원한 계절에 가려고 그동안 미루었다가 하늘이 맑고 날씨가 너무 좋아 
무작정 생각없이 지하철에 몸을 실고 달려 왔다.
 걷기는 힘들었어도 시원한 숲길이어서 좋았고  오랜만에 다시 북문에서 남문까지 산성곽, 능선들의 
아름다움에 흥뻑 바져 들수 있어서 좋았다.

 

후.... 단풍이 붉게 물드는 가을에 다시한번 걷고 싶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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