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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하철로 간 여행지

여주투어2 천년고찰 신륵사

 

2024년8월15일 여주투어2 천년고찰 신륵사

 

여주투어 두번째 신륵사 오전 10시30분 부터 여주 영릉(英陵)과 영릉(寧陵) 돌아본 후 

오루1시 여주 관광단지 천년 고찰 신륵사에 도착해 돌아본다.

 

일주문

 

신륵사는 봉미산 기슭에 위치한 여주의 대표적인 사찰이다. 

오랜 역사와 웅장한 규모, 빼어난 경관을 자랑한다. 

대한불교조계종 제2교구 본사인 용주사의 말사이자 경기도 전통사찰로 지정되었다.
일반적으로 사찰은 산속에 짓는 경우가 많은데 보기 드물게 남한강이 바라보이는 강변에 세워졌다. 

신라 진평왕 때 원효대사가 창건하였다고 전해지나 확실한 근거는 없다.

 고려 말기 나옹선사가 머물렀던 곳으로 유명하며 200여 칸에 달하는 대사찰이었다고 한다.

 

 조선 성종 3년(1472)에는 세종대왕릉인 영릉의 원찰로 삼아 보은사(報恩寺)라고 불렀다가

 원찰로서의 의미가 약해진 뒤 다시 신륵사라는 이름으로 돌아왔다. 

벽돌로 쌓은 다층전탑이 있어 벽절로 불리기도 했다.
경내에는 보물 8점, 유형문화재 4점, 문화재자료 4점 등 다수의 문화재가 있다. 

중요문화재로는 신륵사에서 가장 오래된 건물이자 

지공, 나옹, 무학 3화상의 영정을 모셔놓은 [조사당]과 

극락보전 앞 흰 대리석을 재료로 사용한 [다층석탑], 

신륵사 동남쪽 강가 동산 위에 우뚝 세워진 현존하는 유일의 고려전탑인 [다층전탑], 

나옹화상의 사리를 모신 부도인 [보제존자 석종], 목은 이색이 비문을 쓴 [보제존자석종비] 등이 있다.


신륵사는 수많은 문화재만큼이나 사찰과 관련된 

여러 이야기를 품고 있어 구석구석 들여다보는 재미가 있다.

 여주시에서는 신륵사에 문화관광해설사를 배치해 

방문객 편의를 돕고 있으므로 여주시 종합관광안내소에 전화상담 후 일정을 조율하여 방문하면 좋다.
여주IC, 서여주IC에서 차량으로 약 13분 소요된다. 

신륵사 주변은 국민관광지로 개발되어 인근에 맛집이 많고 

국내 최대 규모의 도자기 전문 쇼핑몰이 있는 여주도자세상, 황포돛배 유람선 등과도 가깝다.

 

신륵사 은행 나무길

가을이면 노란 단풍으로 이길이 아름답게 변모한다 

 

 

신륵사 템플 스테이지 체험관

 

 

불이문

불이문은 대웅전으로 들어가는 경내의 마지막 문으로서 불이란 진리는 둘이 아님을 뜻하며 
진리 그 자체를 다르게 표현한 말로서 
이문을 통과하면 진리의 세계인 불토에 들어가게 됩을 의미한다.
또한 법계의 실상이 평등하며 피차의 차별없는 것을 불이라 해서 불법이문 을 상징한다.
불이의 경지에 도달하면 불의 경지로 나갈수 있다는  상징의 의미있어 해탈문이라고도 부른다.

 

불이문 들어서면 우측 누각이 있다 현액이 없어 누각 이름은 모르겠다.

누각에서 바라보면 남한강 정면 나무들이 가려져 있어 잘 보이진 않아도 

그 자체 만으로도 힐링이 될것 같다.

 

 

누각옆에서 담은 남한강

 

저만치 신륵사가 보이기 시작한다

 

강월헌

신륵사 동남쪽 강가 남한강변에 세워진 강월헌 정자

 

강월헌과 삼층석탑

신륵사 동남쪽 강가 남한강변에 세워진 
강월헌 정자와 삽청석탑
화강암을 깍아만든 삼층석탑으로 
신륵사 다층석탑은 근처 강변 암반에 세워져 있다
불교에서 탑은 부처님의 사리를 모신 무덤 에서 기원한 것이다

 

 

강월헌 정자에서 담은 남한강 풍경들

 

 

 

 

 

삼층석탑

삼층석탑은 나옹선사를 기리기 위한 탑이라 한다  강월헌 이란  나옹선사의 당호로 선사 입적후 
그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그를 추모하여 이곳에 누각을 세워놓고 강월헌 당호를 달아 놓았다 한다.
본래 누각이 석탑과 거의 같이 붙어있었으나 오래전 홍수로 떠내려가 다시 탑보다 
아래쪽에 철근 콘그리트로 지었고 한다.

 

신륵사 은행나무 (수명600백년)

 

이 은행 나무는 신륵사의 상징이며 
여주의 자연 유산으로 자리잡고 있다.
수령이 오래된 만큼 많은 이야기와 전설을 품고 있다.
이 은행 나무는 조선시대 심어다고 전해지고 있다

높이 약22m 둘레 약3미터3.5에 이르는 
거대한 은행 나무는 그 자체가로도 장관이다
특히 여름 푸르른 잎이 무성하고 
가을이 그 잎들이 노란 색으로 갈아 입을때는 
신륵사 방문객들을 발길을 멈추게 하는 마력이 있다

 

신륵사 은행 나무에 오신 관세음 보살

 

 신륵사 다층석탑 오르는 계단

 

신륵사 다층석탑

보물 제226호. 높이 940cm. 한강변에 있는 암벽 위에 건립된 것으로, 

지대석 위에 화강석으로 된 7층의 기단이 있고 그 위에 높은 6층의 탑신부가 있다. 

기단 위에 탑신부의 받침을 마련한 것은 신라시대의 전탑 양식을 따른 것으로 보인다. 

탑신부는 6층 부분만 높이와 너비가 급격히 줄어들었을 뿐 각 층의 체감률이 낮아 전체적으로 고준해 보인다.

각 층의 옥개는 옥신에 비해서 극히 간략화되어 있다. 

상륜부는 전으로 된 노반 위에 화강석으로 된 복발·앙화·보륜·보개 등이 얹혀 있다.

 탑 북쪽에 있는 이 탑의 수리비에 "崇禎紀元之再丙午仲秋日立"(숭정기원지재병오중추일립)이라고 씌어 있어서

 1726년(영조 2)에 중수되었음을 알 수 있다. 현재 유일하게 남아 있는 고려시대의 전탑이다.

 

 

 

신륵사 다층석탑에서 담은 구룔구 전각 전경

 

범종각

구용루 좌측으로 있는 범종각. 1층은 불교용품 판매점이며, 

누각에는 법고. 범종. 운판. 목여등이 있다

 

구룡구 전경

 

구룡구

 

경내 입구에 있는 구룡루. 신발을 벗고 들어가야 한다. 

초창기 구룡루 모양과 많이 다르다. 

구룡루라는 이름은 석가모니 탄생 때 9마리용이 물을 뿌려 부처님을 목욕시켰다는 

경전내용과 신륵사가 창건될 때 커다란 연못을 메우고 

그곳에 살던 9마리 용에게 항복을 받고 그들을 제도하기 위해 지었다는 전설과 연관된다.

 

 

 

 

 

 

삼성각

 

관음전 앞에는 커다란 향나무가 보호수로 지정되어 있다. 자태가 멋지다.

 

 

불단 뒤에 액자처럼 걸려있는게 삼화상이다.가운데 지공. 오른쪽 나옹. 왼쪽 무학대사다

 

건륭삼십팔년명 동종. 조사당안에 있으며, 크기는 작다.

 

명부전

 

명부전 주불인 (사진기준) 지장보살(중앙)과 무독귀왕(좌) 도명존자(우)

 

신륵사 원구형석조승탑. 누군지 모를 신륵사의 옛 스님의 부도들

 

뒤 언덕서 내려다 본 신륵사

 

 

보제존자석종으로 오르는 계단

 

 

신륵사 보제존자석종

보물 제228호. 높이 190cm. 1376년 나옹이 경기도 양주의 회암사에서

 경상남도 밀양으로 돌아가던 중 신륵사에서 입적하자 

1379년 각신과 각주가 절의 뒤편에 있는 봉미산 중턱에 묘역을 마련하고 

나옹의 사리를 봉안한 것이다. 넓은 묘역을 마련하고 전면에 박석을 깔았으며, 

그 위에 넓은 기단을 마련하고 그 위에 놓여 있는 2매의 판석 중앙에 석종형 부도를 안치했다.

기단의 정면과 좌우면 중간에 2단의 계단이 있고,

 탑신은 위로 갈수록 완만한 타원형을 이루다가 

어깨부분에서 수평을 형성하고, 그 위에 보주를 조각했다. 

이 부도의 형식은 신라시대의 전형적인 8각원당형 부도와는

 다른 것으로 라마 탑계에 속하는 특이한 형식이다.

 이러한 계단탑 형식의 부도는 통도사와 금산사 등에 있는데 

이러한 형식을 모방한 것으로 조선시대에 전개되는  석종형 부도의 선구적인 양식을 보여주는 예이다

 

신륵사 보제존자석종 앞 석등

보물 제231호. 높이 194cm. 전형양식에서 변형된 석등으로 

화사석을 제외한 모든 부재가 화강암으로 되어 있다.

팔각 지대석 위에 기단부는 상대·중대·하대가 하나의 돌로 되어 있으며 

8각의 하대석에는 복련이, 상대석에는 앙련이 도식적으로 조각되어 있다.

 중대석(간주석)은 그 길이가 상당히 짧아졌으며

 각 면에는 꽃무늬가 장식된 아(亞)자형 안상이, 각 모서리에는 연주형(連珠形) 우주가 새겨져 있다.

 상대석 위에는 2단의 층급이 있으며 그 위에 납석제 화사석이 있다.

팔각형의 화사석 각 면에는 화사창(火舍窓)이 뚫려 있고, 

모서리에는 반룡이 조각된 원형기둥이 고부조로 새겨져 있다. 

화사석의 상단에는 창방과 평방이 조각되어 있고, 

그 아래 기둥 사이에는 고부조의 비천상(飛天象)을 장식했다.

 전각(轉角)이 두꺼운 옥개석은 둔중한 느낌을 주며 각 면의 합각에 우동만이 둥글게 돌출되어 있다. 

상륜부는 연꽃이 장식된 복발 위에 2단의 층급을 이룬 연꽃 봉오리형 보주가 얹혀 있다.

전체적으로 석등의 우아한 형태와 장식성이 돋보이며, 

기단부의 간주석이 짧아져 상대와 하대의 구별이 뚜렷하지 않은데

 이는 석등이 형식화되어가는 시대적 추이를 반영한 것이다. 

보제존자석종 앞에 있으므로 보제존자인 나옹의 부도가 세워진 1397년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된다

 

신륵사 보제존자석종비

1379년 건립. 보물 제229호. 높이 212cm. 너비 61cm. 

지대석 위에 3단의 직사각형 대석이 놓여 있는데 상단의 대석에 연꽃무늬가 새겨져 있고, 

그 위에 비신을 얹었다. 대리석으로 된 비신의 양 옆에는 화강암 기둥을 세워 비신을 보강하도록 했으며 

그 위에 목조건축물의 공포와 기왓골을 조각한 옥개석을 얹었다. 

이러한 석비의 조형은 이 절에 있는 대장각기비(보물 제230호)와 비슷하다. 

신라시대 이래 일반화된 형식인 귀부와 이수는 고려 말기에 대석과 옥개석으로 변형되기 시작했는데, 

이러한 경향을 보여주는 예이다. 비문의 내용은 이색이 지었고, 글씨는 해서체로 한수(韓脩)가 썼다.

 

신륵사 요약

 

신라 진평왕 때 원효가 창건하였다고 하나 확실한 근거는 없다. 

절 이름인 '신륵(神勒)'에서 륵(勒)은 굴레를 뜻한다. 

고려 우왕 때 인근의 마암(馬巖)에서 용마(龍馬)가 나타나 행패를 부리자 

미륵불 또는 보제존자(普濟尊者) 나옹이 신기한 굴레를 가지고 

그 말을 다스렸다는 설화에서 신륵사란 절 이름이 유래했다고 한다. 

아마도 지세가 약한 곳에 절을 세워 불력(佛力)으로 

남한강의 범람을 막아보고자 했던 바람에서 유래한 설화로 추측된다.

1376년, 고려말의 고승 나옹은 회암사의 주지로 중창불사를 했다가 탄핵을 받아 유배를 떠났는데, 

유배길에 신륵사에 들렀다가 그대로 입적하였다. 

나옹의 제자들은 스승을 그대로 신륵사에서 화장한 뒤 나온 사리를 

회암사와 신륵사에 나누어 부도탑(보제존자석종)을 조성했다.

조선불교계는 나옹의 스승인 범승(인도 승려) 지공(指空),

 나옹, 그리고 두 승려의 공동제자인 무학을 3화상(三和尙)이라고 부르며

 불교의 조사(祖師)로 추앙하였고 민간신앙의 대상으로도 여겼다. 

그리하여 나옹이 입적한 신륵사에도 조사당(祖師堂)을 세워 3화상의 영정을 봉안하였다.

1469년(예종 1년)에 세종의 영릉이 여주로 이장됐는데 

이때 영릉의 원찰(願刹, 능침사찰)에 대한 얘기가 나오다가 

신륵사를 원찰로 하자는 건의가 나와 왕실의 발원으로 

1472년부터 대규모 중수를 시작했다. 

이때 절의 이름을 보은사(報恩寺)로 바꾸기로 했다고 하는데 

실제로는 계속 신륵사로 유지된 것으로 보인다.

 

신륵사 들어가는 입구를 보면 어마 어마한 관광 단지처럼 보인다 
신륵사 관광지 문을 통과 하면 다른곳과 마찬 가지로 
여주 도자기 박물관과 여주 박물관 
맛집, 카페등이 즐비하고 대형 주차장도 마련 되어 있다.


  여기서 아쉬웠던 점은 
천년 고찰 신륵사  여주 관광단지 임에도 불구하고
대중 교통편은 수월 하지가 않다는 점이다 
자가로 오는 방문객들은 상관이 없지만 
나, 뚜벅이로 찾아 오는 방문객들에게는 
대중 교통이 원할하지 않아 큰맘먹고 않으면 

찾아오기 힘들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예전엔 여주 관광 단지 순한 버스가 있었는데.

주중 방문객이 적다는 이유로 여주시에서 중단 시켰다고 하고 

지금은 운영 하지 않고 있다 

내가 알기로 순한 버스가 있을땐 주중에도 방문객이 많은걸로 아는데.

여주시가 미래를 보는 행정을 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