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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하철로 간 여행지

정조의 효심이 깃든 수원 화성행궁

 

2024년8월17일 정조의 효심이 깃든 수원 화성행궁

 

수원하면 제일 먼저 생각나는 정조왕이다.
세계 유네스코에 등재된 화성과 
그 안에있는 화성 행궁은 수원 자랑할 만한 여행지다

 

이곳은 한국의 행궁중 가장 규모가 크고 아름다운 곳으로 
정조의 효심이 느껴지는 곳이다.

 

신풍루(新豊樓)

1790년(정조 14) 창건 2002년 복원

신풍루는 화성행궁의 정문이다. 

조선 정조 13년(1789)에 수원읍의 관청 건물을 세우면서 그 정문으로 지었다. 

처음에는 진남루鎭南樓라 부르다가 

1795년에 혜경궁 홍씨의 회갑연을 열면서 이름을 신풍루로 바꿨다. 

신풍루는 중국 한나라를 세운 유방의 고향인 풍패豐沛에서 따온 이름으로 제왕의 고향 풍패지향豐沛之鄕으로서

 화성을 자리매김하고자 했던 정조의 의지가 반영되어 있다.
건물은 2층의 누각 구조로 아래층은 출입문으로 쓰고, 

위층에는 큰 북을 두어 군사들이 주변을 감시하고 신호를 보내는 용도로 사용했다. 

문루 좌우에는 행랑을 두었고, 양쪽 끝에는 군영을 배치해서 경호 체제를 갖췄다. 

정조는 어머니인 혜경궁 홍씨의 회갑연 때 신풍루에서 

수원 주민들에게 쌀을 나누어 주는 행사를 베풀었는데, 당시의 행사 모습이 그림으로 남아 있다.
* 행랑 : 대문간에 붙어 있는 방

 

 

 

좌익문 앞 소나무 아래에 관아의 사또와 대장금(포토존)

 

좌익문

신풍루에 들어서면 아담한 정원 같은 공간이 있고 그 앞에 좌익문이 있다. 

신풍루에서 봉수당으로 가기 위해서는 두

개의 문을 지나야 하는데 좌익문과 중양문이다.

 이 두 문에는 가운데에 태극문양이 그려 있고 양쪽으로 보조문이 있다. 

아마 평소에는 양쪽 보조문으로 사람들이 출입을 하고 

군왕이 행차 할 때만 태극문양이 있는 가운데 문을 사용했을 것 같다.

 

중양문

 

신풍루에서 봉수당으로 가는 중간에 두번째 정원 같은 

아담한 정원이있고 바로 앞에 중양문이 있다

 

중양문 뒷편 

 

 

봉수당(奉壽堂)

1789년(정조 13) 창건 1997년 복원

봉수당은 화성행궁에서 가장 위상이 높은 건물이다. 

조선 정조 13년(1789)에 고을 수령이 나랏일을 살피는 동헌으로 지었다. 

처음 이름은 장남헌壯南軒이었으나

 1795년 혜경궁 홍씨의 회갑연을 계기로 봉수당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궁궐에서는 대비나 상왕이 머무는 건물에 목숨 수壽 자나 길 장長 자를 붙이는 전통이 있어,

 혜경궁 홍씨의 장수를 기원하며 이름을 바꾼 것이다.
건물은 정면 7칸으로 일반 동헌과 마찬가지로 대청과 방을 둔 구조이나, 

마당 한가운데에는 왕이 지나는 길인 어로를 두었고 건물 앞에는 넓은 기단인 월대를 갖추었다. 

어로와 월대는 일반 동헌에는 없고 임금이 머무는 공간에만 설치하는 시설이다. 

1795년 윤 2월 13일, 혜경궁 홍씨의 회갑 잔치가 열리던 날 봉수당 월대 앞에 

넓은 무대를 설치하고 궁중연희가 편쳐졌다. 당시 행사 모습이 그림으로 남아 있다.
* 월대 : 궁궐의 정전, 묘단, 향교 등 주요 건물 앞에 설치하는 넓은 기단

 

 

봉수당에서의 진찬연

 

혜경궁 홍씨와 회갑 잔치상 

 

 

경룡관(景龍館)

1794년(정조 18) 창건1997년 복원

경룡관은 장락당으로 들어가는 대문 상부에 지은 다락집이다. 

당나라 태종 때 열여덟 명의 학사들이 임금의 시에 

화답한 것을 본떠서 정조가 직접 이름을 지었다.

 경룡관은 당 태종의 궁전 이름이기도 하다. 

아래층 대문 이름은 지락문至樂門이다. 

이는 즐거움에 이른다는 뜻으로 장락당으로 들어가는 것이 즐겁다는 의미이다. 

문의 규모는 작으나 네모난 돌기둥 네 개를 우뚝 세워 위엄을 높였다.

 

 

장락당(長樂堂)

1794년(정조 18) 창건1997년 복원

장락당은 조선 정조 19년(1795) 혜경궁 홍씨의 회갑연을 화성행궁에서 열면서

 혜경궁 홍씨가 머물 처소로 사용하기 위해 지은 건물이다. 

정조는 중국 한나라의 고조가 어머니를 위해 장락궁을 지은 것을 본받아

 어머니 혜경궁 홍씨를 위해 장락당을 짓고 현판의 글씨를 써서 내렸다. 

장락당과 봉수당은 연결되어 있어 자유로운 이동이 가능하다. 

장락당은 임금이 화성에 내려오면 머무는 처소로도 사용되었다.
건물은 전체 13칸 규모이며, 삼면에 툇간을 두어 통행에 편하도록 했다.

 온돌방은 매 칸마다 겹겹이 문을 달아 아늑하게 만들었고, 

문을 모두 열어젖히면 실내가 트이도록 했다. 

정조는 장락당과 복내당 사이의 담장에 다복문多福門과 장복문長福門이라는 

두 개의 문을 내었는데, 

이를 통해 어머니의 복을 기원하는 정조의 효심을 확인할 수 있다.
* 툇간 : 집채의 안둘레간 밖에 딴 기둥을 세워 만든 칸살

 

 

남남헌 노래당으로 통하는 출입문

 

낙남헌 동행각(洛南軒 東行閣).

1794년(정조 18) 창건2023년 복원

 우화관과 낙남헌의 경계를 이루는 17칸의 행각이다. 

이 중 우화관 담장과 연결된 11칸은 행궁과 화성을 지키는 

별무사(別武士)와 수첩군관(守堞軍官)의 숙소로 사용되었다.

낙남헌 동행각은 본래 단청이 없는 건물이다. 

조선 시대 관아는 객사와 주요 문루에만 단청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화성행궁 역시 봉수당으로 향하는 문과 문루, 낙남헌과 노래당, 

미로한정, 우화관 등 일부에만 단청이 있었다.

 

낙남헌 동행각(洛南軒 東行閣) 안쪽 행각

 

 

우화관(于華觀)

1789년(정조 13) 창건2023년 복원
 

우화관은 화성유수부의 객사다. 

객사는 지방수령이 매달 초하루와 보름에 국왕에 대한 의례를 행하는 곳이면서 

관아를 방문하는 관리나 사신들이 머물던 곳이다.

 이를 위해 객사는 국왕을 상징하는 전패(殿牌)를 모시는 정청(正廳)을 가운데 두고 

온돌방과 마루로 구성된 건물을 좌우에 날개처럼 붙인 모습이 일반적이다. 

우화관도 객사의 전형적인 모습을 하고 있다. 

우화관의 정청은 바닥에 벽돌을 깔아 특별히 벽대청(甓大廳)이라 불렀다.

 객사의 전패가 국왕을 상징하기 때문에 화성행궁 전체가 동향으로 배치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우화관은 남향으로 건립되었다.

우화관은 건립 초기 팔달관(八達館)으로 불리었으나 

1793년 수원부가 화성유수부로 승격된 이후 정조의 명에 따라 개명되었다.

 우화관 이름에는 화(華) 지역을 살피러 다니던 요(堯)임금 시절처럼

 태평시대가 되기를 바라는 뜻이 담겨 있다

 

화령전 출입문

 

화령정 중문

 

화령전( 華寧殿)

 

사적 115호 | 1801년(순조 1) 창건

화령전은 정조의 어진御眞 즉 초상화를 모시고 제사지내던 곳이다.

 정전인 운한각을 중심으로 이안청, 복도각, 재실, 전사청과 향대청 등을 갖추고 

내삼문과 외삼문까지 구비하였다. 화령전은 당대 최고 기술자들이 참여하여 약 2개월이라는 짧은 기간에 완성되었다. 

일부 공간은 복원했으나 전체적으로 원형이 잘 남아 있다.

정조는 1800년 6월 28일에 49세 나이로 승하하였다. 

정조의 무덤을 아버지 사도세자의 무덤인 현륭원 가까이에 조성하기로 결정하자 

당시 나라 일을 보던 정순왕후는 현륭원 재실에 모시고 있던 정조 어진을

 화성행궁으로 옮기고 별도로 어진을 봉안할 전각을 짓도록 명령했다. 

이 명에 따라 순조 1년인 1801년 4월 29일 화성행궁 옆에 화령전을 완성하고 

현륭원 재실과 창덕궁 주합루에 모셔져 있던 어진을 옮겨와서 봉안했다.

정조의 아들인 순조는 1804년에 처음으로 화성에 내려와서

 현륭원과 건릉에서 제사를 올리고, 화령전에서 술잔을 올리는 작헌례를 올렸다. 

재위 기간 동안 총 10차례 화령전에서 작헌례를 올렸던 순조를 본받아

 헌종, 철종, 고종도 화성에 내려올 때마다 작헌례를 올렸다. 

평상시에는 화성 유수가 중심이 되어 5일마다 어진과 화령전 건물을 살폈으며

 매년 정조 탄신일과 납일에는 제사를 올렸다. 

화령전은 정조 이후의 모든 왕들이 직접 방문하여 제사를 지냈다는 점에서 그 위상이 높다.

화령전의 정전인 운한각과 이안청 · 복도각은 창건

 당시의 원형을 잘 유지하고 있다는 점이 인정되어 2019년 보물로 지정되었다.

 

정조의 어진御眞 즉 초상화

 

 

 

화령전( 華寧殿)재실

 

 

낙남헌(洛南轩)

1794년(정조 18) 창건

낙남헌은 화성행궁에서 공식 행사나 연회를 열 때 사용하는 건물이다. 

중국 한나라를 세운 유방이 부하들 덕분에 나라를 세울 수 있었음을 감사하며

 낙양洛陽의 남궁南宮에서 연회를 베풀었다는 이야기를 본떠서 이름을 지었다. 

정조는 1795년 을묘원행 당시 낙남헌에서 수원의 백성들을 위해 잔치를 베풀고, 

무과 시험을 치르고 상을 내리는 등 다양한 행사를 열었다.
낙남헌 건물은 벽이 없는 개방된 구조로 많은 사람을 수용할 수 있다. 

연회를 베푸는 건물답게 건물 앞에는 넓은 월대를 두어 격식을 높였다. 

월대로 오르는 계단 양 옆에는 구름무늬가 새겨져 있다. 

낙남헌은 궁궐 전각과 비교해도 손색이 없는 아름다운 건물로 원형이 잘 남아 있다. 

일제강점기에는 수원군청으로 사용되었고, 신풍국민학교 교무실로도 사용되었다.
* 월대 : 궁궐의 정전, 묘단, 향교 등 주요 건물 앞에 설치하는 넓은 기단

 

 

노래당(老來堂)

1794년(정조 18) 창건

노래당은 낙남헌에 잇대어서 지은 화성행궁의 별당이다.

 조선 정조 18년(1794)에 행궁을 증축하며 낙남헌과 함께 지었다. 

정조는 화성에서 노년을 보내기 위해 ‘늙음이 찾아온다’라는 뜻을 지닌 노래당을 짓고, 

그 뜻을 종종 신하들에게 말했다. 

노래당은 아들의 나이가 15세가 되면 왕위를 물려주고 

화성에서 내려와 지내려 했던 정조의 뜻이 담긴 건축물이다. 

출입문은 길이 젊음을 보존한다는 의미로 난로문難老門이라 이름 지었다. 

노래당은 건물의 원형이 잘 남아 있다.

 

 

삼수문

 

봉수당과 장락당 뒤편 행각

 

글읽는 환관

 

채비하는 환관

 

단장하는 상궁

 

 복내당(福內堂)

1789년(정조 13) 창건1997년 복원

복내당은 수원읍 고을 수령과 가족이 거처하는 건물이다. 

조선 정조 18년(1794) 화성행궁에 장락당을 만들기 전까지는 왕의 숙소로도 쓰였다. 

정조가 건물의 이름을 직접 짓고 현판의 글씨를 써서 내렸는데, 

복내福內란 ‘모든 일이 밖에서 제대로 이루어지면 복이 안에서 생겨난다.’는 뜻이다. 

그러나 정조가 쓴 현판은 현재 남아 있지 않다.
복내당은 처음에는 역ㄱ자 모양의 작은 건물이었으나 

1794년에 북쪽으로 온돌방 4칸 반을 추가하면서 ㄷ자 모양으로 확장되었다. 

서쪽으로 서별당이 들어서고, 동남쪽으로도 행각이 늘어나서 주변을 둘러싸고 있다. 

20세기 초 경기도립병원이 들어서면서 철거되어 화성행궁을 복원할 때 다시 지었다.

 

복내당 부엌

 

임금님 수라상

 

임금에게 올리는 밥을 높여 '수라'라고 한다.
수라상은 아침 저녁 하루 두번 올리는데, 기본 음식외에 12가지 찬품이 준비된다.

수라 중간에는 간편한 죽과 미음, 다과를 올린다.

 

대장금 촬영지

 

유여택(維與宅)

1790년(정조 14) 창건1998년 복원

유여택은 수원읍을 옮긴 이듬해인 조선 정조 14년(1790)에 지은 건물로, 

화성 축성을 시작하던 1794년 가을에 증축되었다. 

처음 건물은 은약헌隱若軒으로 부르다가 증축 후 이름을 바꾸었다. 

유여택이란 <시경>에서 주나라의 기산岐山을 가리켜 ‘하늘이 산을 만들고 주시어 거처하게 하였다

此維與宅’라는 고사를 인용해서 지은 이름이다. 

정조는 유여택에서 신하들의 보고를 받고 과거 시험에 합격한 무사들에게 상을 내리기도 했다.

 1800년 정조가 승하한 뒤에는 화령전이 완성되기 전까지 

현륭원 재실과 창덕궁 주합루에 있던 

정조의 초상화를 모시는 공간으로도 사용되었다.
처음 지은 은약헌의 북쪽 1칸은 공신루拱宸樓라는 누마루였는데 

증축하면서 실내에 온돌을 놓고 창호를 달았다. 현재 창호는 복원되지 않았다.

 

유어택 넓은 공간

 

양성근 

궁궐의 꽃 모란

 

뒤주

 

외정리소(外整理所)

1796년(정조 20) 창건 2000년 복원

외정리소는 화성에서 거행되는 국왕의 행차나 행사에 드는 모든 비용 문제를 총괄하는 곳이다. 

조선 정조 19년(1795) 혜경궁 홍씨의 회갑연을 

화성에서 치를 때 행사준비를 담당한 임시기관으로 만들었다.

 화성 성역이 끝난 후에는 행사준비뿐 아니라

 화성행궁의 수리와 군사들의 식량과 말 먹이까지 관장하였다. 

1796년에 유여택 동쪽의 빈의문 밖에 건물을 짓고, 

대문에 외정리아문外整理衙門이란 현판을 걸었다. 

마루로 된 대청 6칸을 중심으로 주위에 행랑과 창고를 두었다.

 

 

 

 

 

 

 

 

비장청(裨將廳)

1789년(정조 13) 창건 2002년 복원

비장청은 고을 수령을 보좌하는 비장들이 근무하는 건물이다. 

화성 유수는 정2품 당상관이었기 때문에 여러 명의 비장을 두었다. 

조선 정조 19년(1795)에 혜경궁 홍씨의 회갑연을 치를 때 

비장은 음식을 차리는 일을 비롯해서 행사의 모든 절차를 담당했다. 

비장청은 유수를 보좌하는 업무 성격에 맞게 고을 수령이 공무를 처리하는 

건물인 동헌(봉수당) 가까이에 두었다.

 화성 축성이 마무리되던 1796년에 서리청의 건물을 수리해서 비장청으로 사용하였다.

 

서리청(書吏廳)

1796년(정조 20) 창건 2002년 복원

서리청은 화성유수부 관청의 여러 사무를 담당하는 하급 관리들이 근무하는 건물이다. 

조선 정조 13년(1789) 수원읍을 옮길 당시에는 장남헌 동쪽에 서리청을 지었다. 

화성 축성이 마무리되면서 서리청의 건물을 비장청으로 사용하고,

 그 동쪽에 있던 금도청을 고쳐서 서리청으로 사용했다. 

행궁 안의 건물들이 보통 10칸 내외 규모인데 비해 서리청은 22칸에 달한다. 

서리청 마당 건너 남쪽에는 문서창고가 있다.
* 금도청(禁盜廳) 도적이나 법을 어긴 자들을 잡는 군사들이 머무는 건물

 

남군영(南軍營)

1794년(정조 18) 창건 2002년 복원

화성행궁의 정문인 신풍루 좌우에 남군영과 북군영 건물을 짓고

 약 100명의 군사가 교대로 행궁을 지켰다. 

남군영은 국왕 친위 부대인 장용영 외영 군사들이 주둔하는 건물이다. 

장용영 군사는 왕이 화성에 내려올 때는 물론 평소에도 화성을 보호하는 역할을 했다. 

봄, 가을로 두 번 시험을 치러서 수석을 차지한 군사에게는 곧바로 관직을 높여 주는 등 

특별한 혜택을 주었다.
* 장용영 외영(壯勇營外營) : 정조의 친위군사조직 중 화성을 지키는 부대

 

정조의 원대한 꿈과 효심이 느껴지는 화성행궁은 전국에 조성한 행궁가운데 

가장 돋보이는 규모와 격식을 갖추었으며 경복궁만큼 아름다운 궁궐로 손꼽힙니다.

華城行宮 | 사적 제478호 | 1796년(정조 20) 창건 | 2002년 복원

화성행궁은 조선 정조 13년(1789)에 정조의 아버지 사도세자의 무덤을 수원부 읍치 자리로 옮기고, 

원래 수원부 읍치를 팔달산 아래로 옮겨 오면서 관청으로 사용하기 위해 건립되었다. 

왕이 수원에 내려오면 머무는 행궁으로도 사용했다.

 정조는 수원도호부를 화성유수부로 승격시켜 위상을 높인 한편,

 1795년 화성행궁에서 어머니 혜경궁 홍씨의 회갑연을 치르기 위하여 건물의 이름을 바꾸거나 새로 지었다. 

1796년에 전체 600여 칸 규모로 완공되었다.

행궁(行宮)은 왕이 지방에 거동할 때 임시로 머물거나 지방에 

별도의 궁궐을 마련하여 임시 거처하는 곳을 말하며, 

그 용도에 따라서 크게 세 가지로 구분할 수 있다. 

전쟁과 같은 비상시에 위급함을 피하고 국사(國事)를 계속 하기 위해 마련된 행궁으로는

 강화행궁, 의주행궁, 남한산성행궁 등이 있고, 휴양을 목적으로 설치된 행궁으로는 온양행궁이 있다. 

그리고 왕이 지방의 능원(陵園)에 참배할 때 머물던 행궁으로 화성행궁이 있다.

정조는 1790년 2월부터 1800년 1월까지 11년간 12차에 걸친 능행(陵幸)을 하였으며, 

이때마다 화성행궁에 머물면서 여러 가지 행사를 거행하였다. 

뿐만 아니라 정조가 승하한 뒤 순조(純祖) 1년(1801) 행궁 옆에 화령전(華寧殿)을 건립하여

 정조의 진영(眞影)을 봉안 하였고 그 뒤 순조, 헌종, 고종 등 역대 왕들이 이곳에서 머물렀다.

화성행궁은 조선 시대 전국에 조성한 행궁 가운데서 가장 돋보이는 규모와 격식을 갖추었으며, 

건립 당시의 모습이 『화성성역의궤』와 『정리의궤』에 그림으로 남아 있다. 

그러나 화성행궁은 일제강점기인 1911년부터 병원과 경찰서로 쓰이기 시작했고,

 1920년대 병원 건물이 신축되며 대부분 파괴되었다.

 현재는 낙남헌과 노래당만 본래 모습을 유지하고 있다. 

1919년 3월 29일에는 자혜의원에 검진을 받으러 가던 김향화를 

비롯한 기생 30여 명이 경찰서(북군영) 앞에서 태극기를 들고 만세를 불렀다.

1980년대 말 지역 시민들이 복원추진위원회를 구성하여 복원운동을 펼친 결과 

1996년 복원공사가 시작되고, 2002년에 중심권역의 복원공사를 마쳤다. 

2016년부터 화성행궁 우화관과 별주의 발굴조사와 복원 사업이 2023년에 건축 마무리지었다..

(상세설명참조:수원 문화재단 홈페이지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