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지하철로 간 여행지

폭염속의 청계천 산책

 

2024년8월9일 폭염속의 청계천 산책

 

ㅎㅎ

폭염속의 청계천 산책 

 

오랜만에 서울 도심 청계천을 무덥고 뜨거운 폭염속에서 산책하듯 걸어 봅니다.

청계 광장,모전교에서 시작 동대문 오간수교까지 땀을 비오듯 흘리면서 걷고 또 걸었습니다.

그러면서 담은 청계천 산책 사진을 오늘의 포스팅 사진으로 올려 봅니다.

 

청계광장

날씨가 폭염이라 방문한 사람들은 보이지 않고 

무슨 홍보차 나온 회사 천막들만 보입니다.

 

청계천 캐릭터 같은데 서울시 마스코드 라 하네요.

귀엽네요.^^

 

모전교 다리위에서 담은 전경들 

 

 

 

 

소원을 빌며 동전을 던지는곳 입니다

 

모전교

 

위치 :무교동길
제원 :폭 27.5m, 연장 19.5m
특징 :전통 대청양식을 도입한 아치교
주변 :서울광장, 덕수궁, 세종문화회관, 신문박물관, 일민미술관

유래 
옛 교량명칭으로 길모퉁이에 자리하고 있는 과일을 파는 과전(果廛)을 '모전[隅廛]'’이라고 불렀는데, 

이 다리가 바로 그 모전 부근에 있었으므로 그렇게 이름하였다. 

종로구 서린동과 중구 무교동 사이의 네거리에 있던 청계천의 옛 다리이다.

 부근에 토산 과일을 파는 모전(毛廛)이 있어서 ‘모전다리’즉 모전교, 모교라고 불렀다. 

그러나 원래는 태종 12년(1412) 종묘입구 서쪽의 개천을 석축(石築)으로 방축하고

 동쪽을 목작방축(木作防築)할 때 석교로 조성하였다. 

당시는 신화방동구교라 불렀으나 영조 연간(年間)에 작성된 

도성삼군문분계지도(都城三軍分界之圖)에는 모전교로 기록되어 전한다.

 

방문객이 보이지 않다 했더니 모두 이곳에 모여 있네요~

흐르는 물에 발들을 담구며 휴식을 취하고 있습니다.^^

 

 

어느 방송사에서 취재 나왔나 봅니다

 

 

 

서울 도심 중앙에 흐르는 물줄기 청계천이라 그런지 

외국인도 많이 보입니다.

 

 

징검다리 

청계천을 걷다보면 종종 이런 징검다리를 볼수 있다.

 

 

와! 이 무더운  땡빛에서 헤드폰 음악을 들어며 책을 읽고 있습니다

 

 

광통교

위치 :서린동 SK빌딩 앞
제원 :폭 14.4m, 연장 23.8m
특징 :정월 대보름이면 도성의 많은 남녀가 답교놀이를 하던 곳으로 유명하다.
주변 :울갤러리, 무교동 낙지골목

유래 
지금 서린동 124번지 부근에 있었던 다리인데 

광통방에 있는 큰 다리였으므로 처음에는 대광통교라 하였다. 

특히 옛부터 서울에서는 큰 다리로 알려져 정월 대보름이 되면 

도성의 많은 남녀가 이 곳에 모여 답교(踏橋)놀이를 하던 곳으로 유명하였다.

서린동 124번지 부근에 있던 다리이다. 

지금의 보신각이 있는 종로 네거리에서 을지로 네거리 방향으로 나아가다가

 청계로와 만나는 길목에 놓여 있었던 다리이다. 

조선시대 광통방(廣通坊)에 있던 큰 다리였으므로 대광통교(大廣通橋)라 했다.

 『세종실록』 지리지에는 북광통교(北廣通橋),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는

 대광통교, 「도성지도(都城地圖)」에는 광통교, 「수선전도」에서는 대광교(大廣橋) 등으로

 각각 기록되어 있어 약간의 차이는 있으나 모두 같은 다리를 나타내는 말이며, 

일상적으로 대광교 혹은 광교라고 불러왔다.

 이 다리에 놓여진 돌들은 조선왕조를 개창한 태조 이성계의 계비 강씨의 묘를 황화방 정동에서 

성북구 정릉동으로 옮기고 당초 묘에 썼던 돌들을 옮겨 다리를 건설하는 데 사용하였다. 

왕비의 묘에서 잘 다듬어진 돌들을 다리를 건설하는데 

사용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나 조선초기의 정치상황을 보면 이해할 수 있다.

 

 

즉 이성계가 자신의 왕위를 강씨의 소생인 방석(芳碩)에게 넘겨 주려 하자

 전처 소생인 이방원이 난을 일으켜 정도전과 방석을 죽이는 사건인 왕자의 난이 발생하였다. 

이후 정권을 장악한 이방원이 자신의 계모인 강씨의 묘를 옮기는 과정에서

 묘에 사용되었던 돌들을 다리로 옮겨 놓은 것이다.

 당시 이방원의 강씨에 대한 미움의 정도를 파악할 수 있는 대목이다.

 

 

 

 

 

 

광교

위치 :남대문로(광교사거리)
제원 :폭 45.5m, 연장 23.3 ~ 35.7m
특징 :옛 멋과 미래와의 만남을 상징하는 다리(광통방에 있던 크고 넓은 다리라는 의미)
주변 :보신각, 광통관, 미문화원 전시실, 공평아트센터, 인사동문화권-명동문화권 연결

유래 
광통방에 있던 크고 넓은 다리라는 의미에서 옛부터 광교라 일컬어졌으며, 현재 광교 사거리가 이 위치에 해당된다.

 

광교아래 모습

 

 

털말리고 있고 있는 산비둘기 

방금 시원하게 목욕을 한것 같습니다.^^

 

중간중간 이런 풍경도 담습니다^^

 

 

 

공평동 꼼장어 건물 

걷다가 건물이 이뻐서 담았습니다.

 

 

참! 정겹습니다.

날씨는 무덥고 뜨거워도 이렇게 나오니 좋습니다.^^

 

 

 

장통교

위치 :젊음의 길(관철동)
제원 :폭 11.8m 연장 22m
특징 :관철동과 장교동을 잇는 다리
주변 :중구 문화원, YMCA회관, 조흥은행 백년관

유래 
현 중구 장교동 51번지와 종로구 관철동 11번지 사이 청계천에 놓였던 다리이다. 

이 다리 근처에 ‘장찻골’로 불리는 마을이 있었다 하여

 이 부근에서는 ‘장찻골다리’라 부르기도 한다. 

그러나 원명은 중부 장통방에 있던 다리이므로

 장통교, 혹은 줄여서 장교라 하였다.
중구 장교동 51번지와 종로구 관철동 11번지 사이 청계천에 놓였던 다리이다.

 이 근방이 조선시대 장통방(長通坊)이었으므로 붙여진 이름이며, 

이 다리 부근에 긴 창고가 늘어서 있었다 하여 장창교(長倉橋)라고 불렀고 

달리 장찻골다리라고도 불렀으며, 장통교를 줄여서 장교(長橋)라고도 불렀다. 

다리 서쪽 기둥에 '신미개조(辛未改造)'와 '기해개조(己亥改造)'의 

8자가 새겨져 있는 것으로 보아 두 차례에 걸쳐 보수되었음을 알 수 있다.

남산에서 발원하여 북쪽으로 흘러 내리는 창동천과 회현동을 거쳐 내려오는 

물줄기가 소광통교에서 만나고 다시 남산동천의 물줄기와 합하여져 

이 다리 앞에서 청계천의 본 물줄기와 합하여 진다. 

따라서 장통교를 중심으로 서쪽에는 삼각주를 이루어 넓은 지세를 형성하고 있다. 

이 일대는 일찍부터 도성 안 상업의 중심지가 되어 시전상인들이 모여 살던 곳이며,

 중앙과 지방 관청의 연락사무를 맡아 보던 경주인(京主人)들의 본거지였다. 

뿐만 아니라 19세기 중인으로서 개화 물결에 능동적으로 대처하면서
 선각자적 역할을 수행한 유대치(劉大致)가 장통방 지금의 보신각 뒤편에 살았었다.

 

 

정조대왕 수원행렬도 

 

청계천 인공폭포

 

 

외가리 

 

 

청계천 걷다가 힘들면 벤취에서 잠 쉬가도 됩니다.

 

삼일교

위치 :삼일로
제원 :폭 43.5m, 연장 22.6m
특징 :인사동, 명동성당 등을 연계한 근대 건축의 이미지 반영
주변 :탑골공원, 명동성당

유래 
1919년 3월 1일 탑골공원에서 독립선언을 한 뒤 전국에서 일제의 탄압에 항거하는 

시위운동을 벌였기 때문에 이를 기념하기 위해 명명된 삼일로 인근에 위치하여 명칭을 인용했다.

 

삼일교아래 꽃그림벽화

 

 

 

 

어린딸과 함께 나온 엄마도 있습니다.

바라만 봐도 흐믓합니다

 

 

나란히 걸어가는 저 외국인 

연인인지 부부인지 궁금해 집니다.^^

 

걷다보니 천태일 기념관 건물도 보게 됩니다.

 

수표교

제원 :폭 8m, 연장 23.4m

특징 
수표교가 놓여진 것은 1420년(세종2)으로 당시 이곳에 마전(馬廛)이 있어서 마전교라 불렀으나,

 1441년(세종 23)에 다리 옆에 개천의 수위를 측정하기 위해서 수표석(水標石)을 세운 이후 수표교라고 하였다.

 수표교의 원형은 1959년 청계천을 복개할때 장충단공원으로 옮겨졌다.

 

 

관수교

위치 :돈화문로(청계3가)
제원 :폭 25.5m, 연장 22.5m
특징 :전통 대청양식을 도입한 아치교
주변 :창덕궁, 창경궁, 남산한옥마을, 한국의 집, 백마 갤러리

유래 
관수교(觀水橋)는 1918년 일본에 의해 지금의 청계 3가 사거리에 놓여있던 다리이다.

 이곳에 청계천 준설사업을 위한 준천사가 설치되어 있었고 

준천사에서 청계천의 수위를 관측하였다는 데서 유래한 옛 교량 명칭으로 현 관수동에 위치 함

 

 

능소화 

이 무더운날 끈질게 피어있는 능소화가 보여 담았습니다.

 

시원한 물둘기

그냥 주저앉자서 발을 담구고 싶어집니다~^^

 

새현상사 건물과 카페건물 

 

분수대

 

세운교

위치 :세운상가 앞
제원 :폭 50m, 연장 22.1m
특징 :세운(조명)상가 특성을 활용해 빛을 표현
주변 :세운상가(전자,조명시장), 종묘시민공원

유래 
현 세운상가에 인접하여 세워지는 다리로, 세운상가의 명칭을 인용

 

세운상가

 

 

세운상가옆 공구점들

 

배오개다리

위치 :배오개길(청계4가)
제원 :폭 25.5m, 연장 23.4m
특징 :배오길을 넘는 사람들의 만남을 상징화
주변 :광장재래시장(주단,포목), 묵정공원

유래 
현 종로4가 네거리에 배오개(梨峴)라는 고개가 있었으므로 배오개길이라 명명한 이름에서 유래

 

 

여진사님 

저처럼 오늘 청계천을 담으시려 오신분 같습니다.

몰래 살짝 담았습니다~^^

 

새벽다리

위치 :방산시장 앞
제원 :폭 10m, 연장 23.2m
특징 :시장 천막의 이미지를 막구조로 적용하여 동대문 재래시장의 역사성 및 향수 연출
주변 :광장재래시장(주단,포목), 방산재래시장(인쇄,지물)

 

일급수 물이라 잉어도 사는가 봅니다.

오늘 처음 봤습니다.^^

 

마전교

위치 :훈련원로(청계5가)
제원 :폭 40.5m, 연장 21.6m
특징 :빛의 마을(창선)과 우마(牛馬 )시장의 유래표현을 위해 전통문살모양의 조명과 청동말(馬)상 배치
주변 :훈련원공원, 한국기독교기념관, 묵정공원, 동대문시장, 대학로권 연결

유래 
인근 옛교량 명칭으로, 다리 부근에 우마(牛馬)를 매매하는 마전(馬廛)이 있었던 것에서 인용

 

 

 

베롱나무꽃 

 

나래교

위치 :평화시장 앞
제원 :폭 6.0m, 연장 22.8m
특징 :나비의 힘찬 나래짓을 이미지화 하였으며, 3차원 아치와 케이블로 나비형상화 유도
주변 :의류종합 동대문시장, 평화시장

유래 
나비가 날개를 활짝 편 형상의 다리로, 동대문 의류상권의 중심지역에 

위치하는 교량. 인근 동대문 의류상권이 세계 패션 1번지로 비상하는 의미를 담음

 

담쟁이 벽도 아름답습니다.

 

 

버들다리(일명:전태일다리)

위치 :통일상가 앞
제원 :폭 17.0m, 연장 23.3m
특징 :사교에 따른 보행자 동선을 위해 차보도 분리 파골라 설치로 도심 속의 정원 연출
주변 :전통재래시장 (평화,동화,광의,덕운시장), 헌책 골목, 중구구민회관

유래 
과거 오간수문 상류에 왕버들이 많았었다는 데서 명칭을 인용하였으나 

서울시 지명위원회에서 재검토 권고로 공식명칭 사용 보류

 

청계천 5가와 6가쯤 되는 곳에 전태일다리라고 명명된 다리가 있다. 

청계천 공사를 하면서 서울시는 애초 다리 이름을 버들다리라고 정했지만, 

노동단체들이 전태일 열사가 불꽃처럼 산화한 곳이란 역사성을 들어 전태일다리로 명명하자고 요구했다.

 2010년 서울시는 이런 건의를 받아들여 버들다리와 전태일다리를 함께 부르는 것으로 합의를 이끌어 냈다.
 전태일이 누구인지를 굳이 설명할 필요는 없다.

그는 대한민국 사회에 노동운동 역사에 큰 획을 그은 인물이다.

1970년 11월 13일 낮 서울 동대문 평화시장 앞에서 피복공장 

재단사로 일하던 22살의 청년 전태일은 전신에 석유를 뿌리며 “우리는 기계가 아니다.

 내 죽음을 헛되이 말라.”고 절규하며 쓰러졌다. 그는 끝내 일어나지 못했다.

전태일은 갔지만, 그의 뜻은 노동자들의 몸부림으로 살아났다.

 대한민국의 노동운동은 전태일 열사 등장 이전과 이후로 구분될 정도로, 

그는 상징적 존재다. 전태일 분신 사건 이후 노동자들의 열악한 상황에 대해 국민들의 인식이 높아졌고,

 지식인과 대학생들 사이에 노동운동의 중요성을 각성하게 되었고, 사회운동의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

전태일의 희생으로 고도성장의 그늘에서 저임금, 장시간 노동 등 장시간 

노동조건을 강요당하는 근로자들의 목소리가 높아졌고, 노동운동의 조직화, 

노동운동 이론의 과학화도 병행, 발전하는 계기가 되었다.

 

전태일 다리에는 큼직한 전태일 반신상이 자리하고 있다. 

전국의 노동단체와 민주단체들이 십시일반으로 모금해 2005년에 만든 동상이다.

 그의 몸은 불태워졌지만, 전태일은 그곳에서 다시 살아난 것이다

 

버들다리 앞 전통재래시장 (평화,동화,광의,덕운시장)

 

 

버들다리앞에서 담은 오간수교 방향 풍경

 

오간수교 앞 분수대

 

오간수교

위치 :흥인문로(청계6가)
제원 :폭 59.9m, 연장 22.9m
특징 :사각지대의 공간을 녹지로 조성하여 끊어진 남북 노지축을 연결하며,

동대문과 연계한 옛 성곽 복원
주변 :동대문, 장춘단공원, 동대문운동장, 국립극장, 밀레오레, 두산타워

유래 
동대문에서 을지로 6가로 가는 성벽 아래 청계천 6가에 있던 다리이다.
홍예문(紅霓門)으로 다섯 칸으로 되었다 하여 

"오간수다리" 또는 "오간수문" 이라 하였다
- 이 다리는 청계천 물줄기가 도성을 빠져 나가는 지점에 놓여 있던 다리이다.

 즉 서울에 성곽을 쌓으면서 청계천 물이 원활하게 흘러갈 수 있도록

 다섯 개의 아치형으로 된 구멍을 만들었고, 

그 위로 성곽을 쌓아 올렸으며, 아치 모양의 구멍을 서로 연결하여 

성벽 안쪽으로 장대석을 연결하여 다리를 놓았다.

 이 다리가 동대문 옆의 오간수문을 설치한 다리이므로 오간수다리라 불렀다.

 이 오간수문은 물길이 잘 빠져가기 위해 가설한 것인데

 조선시대에는 도성 안에서 죄를 지은 자가 도성을 빠져 달아나든가 

혹은 밤에 몰래 도성 안으로 잠입하는 사람들의 통로로 곧잘 이용되기도 하였다.

 그 예로 명종 때 전국적으로 사회를 흉흉하게 만들었던 

임꺽정의 무리들이 도성에 들어와 전옥서를 부수고 

도망갈 때도 이 오간수문을 통해 달아났었다. 

이 다리는 1907년 일제가 청계천 물이 잘 흘러가도록 한다는 미명하에

 오간수문을 모두 헐어버릴 때 함께 사라지고 콘크리트 다리로 교체되었다가 

후에 성곽이 훼손되는 것과 함께 오늘날에는 그 자취를 찾아볼 수 없다. 

마전교와 오간수다리 사이에는 조선시대 때 청계천의 하상을 준설하고

 여기에서 나온 흙들을 쌓아 인공적으로 만든 산인 가산(假山)이 있었다.

 

오간수교 위에서 담은 평화시장 건물들 

 

 

 

여기까지 

오랜만에 청계천을 걸었습니다.

나머지 맑은내다리 쪽 청계천은 다음에 살펴 보기로 하고 

오늘 여기 온간수교  흥인문로에서 끝을 맺습니다.

요즘 무덥기는 무덥습니다.

한낮의 거리의 열기는 불덩이 같고 조금만 걸어도 

온몸 땀으로 샤워 하곤 합니다.

이렇게 무덥고 뜨거운 요즘 같은날 

잇님들은 그냥 집에서 쉬어라 하지만 

아무도 없는 오직 저뿐인 집

하우종일 집에 머물러 봐도 누구하나 오지 않는 텅빈듯한 집 

말한마디 나눌 상대자 하나 없는 집 

이런곳에 무기력하게 있는것 보다는 외출하면 

카메리 하나 달랑들고 나가 어디든  지하철로 간 여행 을 떠나서 

사진을 찍고 시간을 보내다 보면 하루가 금방이더라구요.

날씨는 무덥고 폭염이지만 

카메라 하나 달랑들고 가는곳 마다 사진을 찍다 보면 걸음수도 15000에서 20000보 

이렇게 하루를 보내다 보면 건강도 좋아지는 것 같고 

밤에 잠도 잘 오는것 같더라구요.

이렇게 이 무더운날 온세상이 불덩히 같은 폭염에 외팔이 진사 김재학이가 

사진을 찍고 편집해서 블로그 포스팅 해도 알아주는 이 없어도 

혼자있는 집보단 나을것 같아 외팔이 진사는 오늘도, 내일도 지하철 여행 떠날 것입니다.

저 만의 즐거움, 행복 위해서 라고 말씀 드릴수 있겠습니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