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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하철로 간 여행지

진관사 답사

 

2024년7월14일 진관사 답사

 

안녕 하세요? 이웃님들~^^

어제, 은평 한옥마을 산책하며 둘러보고난뒤 

두번째로 둘러본 진관사 사진을 포스팅 해 봅니다.

진관사 또한 천천히 감상 하시고 유익한 시간 되시기 바랍니다!~^^

 

진관사(津寬寺)는 대한불교조계종 직할사찰로, 동쪽의 불암사, 남쪽의 삼막사, 
북쪽의 승가사와 함께 서쪽의 진관사로 예로부터 서울 근교의 4대 명찰(名刹)로 손꼽힌 이름난 사찰이며, 
거란의 침입을 막아내고 국력을 수호한 고려 제8대 현종(顯宗)이 1011년(顯宗 2년)에 
진관대사(津寬大師)를 위해 창건했으며, 6.25 당시 폭격으로 폐허가 되었다가 복구된 고찰로 전해집니다. 
또한 '신라시대 고찰'이란 설과 조선 후기 승려 성능(聖能)이 찬술한 「북한지(北漢誌)」에서는
원효대사가 진관대사와 더불어 삼천사와 함께 세웠다는 설도 전해집니다.

 

고려시대의 진관사

이후 진관사는 임금을 보살핀 은혜로운 곳이라 하여 
고려시대 여러 임금이 왕래하면서 왕실의 각별한 보호와 지원을 지속적으로 받게 됩니다.
1090년(宣宗 7년) 10월에 선종(宣宗)은 진관사에 행차하여 
오백나한재(五百羅漢齋)를 성대하게 봉행하였으며, 
1099년(肅宗 4년) 10월에는 숙종(肅宗)이 진관사에 친행하였고, 
그 후 1110년(睿宗 5년) 10월에는 예종(睿宗)이 진관사에 순행하는 등 
역대 왕들이 참배하고 각종 물품을 보시하는 국찰(國刹)로서 자리매김하게 되었습니다.

 

삼천사 가는길

 

일주문

 

조선시대의 진관사와 수륙사

고려시대 이래로 역대 왕들의 왕래가 빈번했던 진관사는 
조선시대에 수도를 서울로 옮기면서 제2의 전성기를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조선시대에는 수륙재(水陸齋)의 근본도량으로서 명성을 떨치게 되는데, 
권근(權近)이 지은『수륙사조성기(水陸社造成記)』에 그 전모가 전해집니다.

1397년(太祖 6) 정월에 태조는 내신 이득분(李得芬)과 조선(祖禪)스님에게 
조상의 명복을 빌고 나라일로 죽어 제사조차 받지 못하는 굶주린 영혼을 위해 
수륙사(水陸社)를 설치할 것을 명하게 됩니다. 
이에 이득분과 상충달(尙忠達), 지상(志祥)스님은 
북한산과 도봉산을 답사한 결과 수륙재를 열기에 가장 적합 곳으로 진관사를 선정하게 됩니다.

수륙사 건립은 조선을 건국하면서 전쟁에서 죽어간 고려왕실의 영혼을 기리는 목적에서였으며, 
내면적으로는 불안정한 국민정서의 동요를 막고 조선왕실의 안정을 꾀할 목적도 겸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이후 태조는 진관사에 수륙재(水陸齋)를 
개설하도록 공사를 지시하고 절에도 행차하였으며, 
1397년 9월 낙성식에도 참여하였습니다.
이에 고려시대 역대 왕들의 지원을 받던 진관사는 
조선왕조의 국가적 수륙재(水陸齋)가 개설되는 사찰로서 다시 전성기를 누리게 됩니다.
당시 진관사에 조영된 시설물은 모두 59칸으로, 상,중,하단의 삼단을 기본구조로,
 중,하단에 행랑이 연이어 들어서 있는 왕실사찰로서의 위엄과 규모를 갖추게 됩니다.

이후 불교를 배척하던 태종 역시 1413년(太宗 13)에 진관사에서 성녕대군(誠寧大君)을 위한
 수륙재를 열고 향과 제교서(祭敎書)를 내렸으며, 
수륙재위전(水陸齋位田) 100결을 하사하여 재를 계속하게 하였습니다.

따라서 절에서는 매년 1월 또는 2월 15일에 수륙재가 열려 
조선왕실의 명실상부한 수륙도량으로서 인정받게 되었으며, 
국찰(國刹)로서 자리매김하게 되었습니다.

세종 때에는 1421년(世宗 3)에 태종 내외의 명복을 빌기 위하여 
재를 올린 이후부터 왕실의 각종 재를 봉행하는 사찰로 국가에서 정례화시켰습니다. 
그리고 세종은 1442년(世宗 24)에 진관사에 집현전 학사들을 위한 독서당을 세우고 
성삼문, 신숙주, 박팽년 등과 같은 선비들을 학업에 몰두하도록 하였습니다.
독서당 건립 후 진관사에서는 학사들과의 교류가 빈번해지면서 왕실과 사대부, 
그리고 서민들까지 애용하는 전국민의 사찰로 확대되었습니다.

또 1452년(文宗 2)에 대대적인 중창불사가 이루어지는데, 
1463년(世祖 9)의 화재로 일부가람이 소실되어 피해를 입게 되었습니다.
그 후 1470년(成宗 1)에 벽운(碧雲)스님이 다시 중건하고, 
1854년(哲宗 5)과 1858년에 중수되었으며, 
1879년(高宗 16)에는 당두화상(堂頭和尙) 경운(慶雲)대선사가 
큰방 34칸을 지어 국찰로서의 대가람을 형성하게 되었습니다.

 

일주문을 지나면 마음의 정원 이라는 푯말이 보이는 이터널이 있어

이터널따라 진관사 극락교를 지나 해탈문으로 갑니다.

 

 

극락교

 

극락교를 넘기전 북한산 항로봉으로 가는 계곡과 데크길이 있습니다

 

극락교위에서 담은 계곡

 

 

 

해탈문

 

부도

 

아미타불 바위

 

진관사로 오르는 언덕길

 

마음의정원 길

 

 

 

연지원

휴식을 취하며 차와 음료를 마실수 있는공간

 

 

 

보문원

 

세심교

 

심심교위에서 담은 계곡 

얼마전 까진 발을 당구며 휴식을 취할수 있었는데.

얼마전 큰장마비로 인해 출입이 전면 금지가 되었답니다

 

진관사 오층탑

 

주변 넓은 잔디로 깔려 있어 

많은 방문객들의 쉼터로 이용되고 있습니다.

 

 

 

홍제루

진관사 경내로 들어가기 전 초입에 있는 누각으로 
정면 3칸, 측면 2칸의 2층 누각형식의 건물로서 1층은 석주기둥으로 구성되었고 
2층은 팔작지붕의 목조건물로 1977년에 진관스님이 신축한 건물입니다. 
절에 진입하는 출입구로 경내에 들어서려면 
누각아래의 중앙 계단통로를 이용해야 하는데, 
건물 1층은 석주를 세워 하부구조가 드러나 있으며, 
석주에는 「대종대시주비」가 새겨져 있어 
조선후기 진관사의 역사를 짐작할 수 있습니다. 
이외 석주 좌우로는 목조로 만든 출입구가 있으며, 
출입구에는 사천왕문을 대신한 듯 인왕상이 단청되어 있습니다. 
이외에 2층은 현재 강당으로 사용되는데, 
내부는 우물마루를 깔아 사찰을 참배하고 
집회를 할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하였으며, 
외부는 계자난간을 둘러 진관사를 찾는 참배객들의 휴식처로도 사용되고 있습니다.

 

 

대웅전

대웅전은 석가모니 부처님을 모시는 진관사 가람의 중심 전각으로 
대웅전 안의 불상은 석가모니불(현세불)을 중심으로 좌우에 제화갈라보살(과거불), 
미륵보살(미래불)의 삼세불三世佛을 모시고 있습니다. 
후불탱화는 비로자나불(법신불), 노사나불(보신불), 
석가모니불(화신불)의 삼신불三身佛이 모셔져 현상과 
시간에 걸림이 없는 원융한 부처님 세계를 펼쳐 보이고 있습니다.

 

적묵당

 

명부전

명부전은 저승세계인 명부冥府를 상징하는 곳으로, 
그곳에서 중생을 제도하여 극락왕생으로 이끄는 지장보살님을 중심으로 
저승세계의 심판관들인 시왕十王이 좌우로 늘어 모셔져 있습니다. 
명부전은 지장보살이 중심이 되기에 지장전地藏殿이라 부르기도 합니다. 
지장보살의 좌우 협시挾侍는 스님모습의 도명존자와 상자를 든 무독귀왕입니다. 
명부전의 편액과 주련은 한국 근대불교의 대강백大講伯인 탄허呑虛스님의 글씨입니다.

 

나한전

나한은 부처님의 깨달은 제자들을 말하며 ‘
공양을 받을 자격이 있는 분’ 이라 하여 응공應供이라고도 합니다. 
독성전과 더불어 가장 오래된 나한전에는 소조 석가삼존상(서울시 유형문화재 제143호), 
소조 16나한상(서울시 유형문화재 제144호), 영산회상도
(서울시 유형문화재 제145호)등이 봉안되어 있습니다.

 

독성전과 칠성각

 

먼저 독성전은

독성獨聖은 ‘홀로 깨달은 분’이란 뜻으로 주로 나반존자那般尊者라고 부릅니다. 
나반존자는 16아라한의 한 분이신 빈두로파라타존자를 말하며 
신통이 뛰어나서 부처님이 열반하신 후에도 세상을 제도하면서 
중생의 복전福田이 되는 분입니다. 
독성전에는 독성상(서울시 문화재자료 제11호), 
독성도(서울시 문화재자료 제12호)와 함께 
산신도(서울시 유형문화재 제149호)도 함께 봉안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칠성각은

칠성각(서울시 문화재자료 제33호)은 북두칠성을 
상징하는 치성광여래와 일광보살, 월광보살, 칠성대군을 모신 곳입니다. 
칠성신앙은 수명과 복, 아이를 점지해 준다고 하여 민간에서 
오래전부터 신앙되어온 것이 불교에 흡수된 것입니다. 
석조여래좌상(서울시 문화재자료 제10호)과 
칠성도(서울시 유형문화재 제147호)가 봉안되어 있습니다.

 

 

정각

나가원 아래에 있는 정면 1칸, 측면 1칸의 사모지붕의 목조건물로,
 1975년에 진관스님이 신축한 것이다.
건물은 계단석이 있는 가구식 기단 위에 원형초석을 두고 
그 위로 두리기둥을 세워 다포를 받친 모습으로, 
사면이 개방되어 있으며, 기둥에는 낙양각이 장식되어 있다.
건물 외부는 어간에 근대 불교계의 대강백(大講伯) 
탄허(呑虛)스님이 쓴 동정각(動靜閣)이라는 편액(扁額)이 걸려 있으며, 
기둥 외부로 주련(柱聯)이 있다.
건물 내부는 진관사의 범음을 전달하는 범종(梵鐘)이 걸려 있는데,
1974년에 조성된 것으로 높이 160㎝, 구경 91㎝, 300관의 대형범종이다.

 

정각옆 쉼터

 

향적당(산사음식체험관)

향적은 중향(衆香) 나라의 부처님 이름으로
 나라의 법의 향기가 시방무량세계(十方無量世界)에 주류(周流)한다는 뜻입니다. 
향을 넣어 두는 바리때를 향적주(香積廚)라 하고, 
음식을 잘 만드는 곳으로 향적세계 곧 향적계(香積界)가 있습니다. 
진관사 향적당은 보현보살님을 봉안하고 있습니다. 
진관사 산사음식연구소는 1700년 동안 이어진 사찰의 음식문화와
 그 정신을 계승함과 동시에 사찰음식의 대중화를 위해 노력하고 있습니다. 
또한 진관사를 찾은 수많은 외국인들에게 산사음식을 직접 배우고 맛보게 함으로써
 한국의 깊은 마음과 불교의 정신을 알리는데 앞장서고 있습니다.

 

근,현대의 진관사

근대에는 1908년에 송암(松庵)선사가 경내에 오층석탑을 조성하였으며, 
1910년에는 경운(慶雲)선사에 의해 대대적인 중창불사가 이루어졌습니다.
그는 대웅전 삼존상을 개금하고, 
아울러 명부전의 지장보살상과 시왕상, 시왕탱화 등을 개금ㆍ보수하였습니다. 
또한 독성전과 칠성각을 신축하고, 자신이 소유했던 토지를 
사찰에 무상으로 돌려 '백련결사염불회' 의
 자원으로 쓰게 함으로써 근대 진관사 중창주로서 족적을 남겼습니다.

그러나 근대기의 열성적인 노력으로 일신한 진관사는 
1950년 한국전쟁 때 나한전 등 3동만을 남기고 모두 소실되었습니다.
이에 폐허만 있던 진관사는 1963년 비구니 최진관(崔眞觀)스님이 
발원하여 건물을 차례로 재건하여 오늘에 이르게 됩니다.
진관(眞觀) 스님은 1965년에 현재의 대웅전(大雄殿)을 신축하고, 
1966년에 삼존불(三尊佛) 을 조성하였으며,
 1967년에 후불탱(後佛幀) 및 신중탱(神衆幀) 을 조성하여 
진관사 주법당(主法堂)을 여법(如法)하게 일신하였습니다. 
또 1968년에는 명부전(冥府殿)을 비롯하여 
1969년에 지장보살과 시왕상을 조성하였으며, 
1970년에는 일주문과 동별당을 신축하고, 
1972년에 나가원(那迦院) 을 신축, 1974년에 범종(梵鐘) 조성, 
1975년 동정각(動靜閣) 신축 등 진관스님의 불사로 
옛 가람(伽藍)의 자취를 찾는 여법한 가람(伽藍)이 복원되었습니다.

또한 진관스님은 부처님의 자비사상과 중생구제의 원력을 
사회복지와 포교 활동을 통하여 실현하고자 
1996년에 진관사 부설 포교당인 보현정사와 코끼리유치원을 신축하였으며,
 2007년 9월에 사회복지법인 진관무위원을 
설립하여 지역사회 복지증진을 위한 또 다른 장을 열었습니다.

 

진관사와 독립운동

진관사(津寬寺)는 고려 8대 임금 현종 2년(1011)년에 건립된 천년 고찰입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전각들이 한국전쟁 때 공비소탕작전으로 소실되고 
나한전(羅漢殿), 칠성각(七星閣), 독성전(獨聖殿) 등 3동의 불전(佛殿)만 남았습니다.
그 중 칠성각과 독성전이 2009년도 5월부터 전면적으로 보수작업을 하게 되어
 건물해체과정 중 대들보에서 상량문이 발견되어 
1911년에 칠성각이 조성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또한 5월 26일 칠성각 내부해체 과정에서
 칠성각의 불단(佛壇)과 기둥 사이에서 한지로 된 큰 봉지가 벽면에 부착되어 있어서 
이를 떼어내자 태극기를 보자기처럼 사용하여 싸여져 있는 
독립신문 등 20여점의 독립운동 관련 유물들이 발견되었습니다.

발견된 태극기는 1919년 3.1운동 당시 기관이나 단체가 제작하여 
사용했던 것으로 보이며 당시 일장기 위에 태극기를 그린 것으로 
태극기 및 독립운동사에서 중요한 역사적 가치를 가지고 있습니다. 
또한 신대한신문 2, 3호가 최초로 발견되는 등 
신대한신문 3점, 독립신문 4점, 조선독립신문 5점 등 
1919년 6월 6일부터 12월 25일까지 제작된 다수의 사료가 발견되었습니다.

이 사료들은 3.1운동 당시의 생생한 역사를 알 수 있는 중요한 자료들입니다.
발견된 사료들은 진관사에 주석했던 독립운동가 백초월 스님이 
1920년 초, 일제에 체포되기 직전 긴박한 상황에서 
비밀리에 진관사 내의 한적한 건물(칠성각)의 벽속에 
숨겨 놓은 것으로 추정됩니다. 
빛이 차단된 밀폐공간에서 90년간 기적적으로 보존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글참조:진관사 홈페이지)

 

이상 입니다.

휴일 하루 은평 한옥 마을과 진관사를 방문하여 

천천히 걸으며 산책을 하고 

정겨운 한옥과 진관사의 전각과 역사를 탐방 배울수 있어서 

뜻 깊은 하루였던것 같습니다.

 

이웃님들!~

오늘도 저의 부족한 지하철 여행 티스토리 찾아주시고 

천천히 사진들을 둘러 보시며 감상해 주시는 분들께 감사 드립니다.

 

오늘부터 서울지방도 장마의 전선으로 많은비가 내린다는 예보가 있습니다.

그러나 바깥 세상에는 비가 내릴지라도 마음만은 즐겁게 행복한 하루 되셨으면 해봅니다.~~^^

 

오늘도 행복한 하루 건강한 하루 되십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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